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쁨
나는 상담하러 온 사람들에게 지난날 즐거움을 느꼈던 일에 대해 질문했다가
어릴 적 나무 위로 올라가곤 했다던가 굴속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숨어 있는 것 같은 종류의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어떤 부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싸우고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상황이
벌어지면 언제나 잔뜩 언짢은 얼굴로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곤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망쳐서는 목수였던 할아버지가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흔들의자는 커다란 백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으면 마치 그 집안의 가장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큰 존재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그 의자 위에서는 자신을 이전보다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었다.
자신이 더 강해지는 것 같고, 내면에서 힘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 입에서는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아버지의 고함소리와 폭력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것을 잔뜩 언짢은 얼굴로 표현했고,
그런 얼굴로 아버지와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오는 파괴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언짢은 얼굴로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계속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버지에게 너무나 큰 힘과 권위를 준 격이 되었을 것이다
백조모양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품위를 되찾아 자신의 가치를 다시 만나고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 집안의 가장이나 된 듯이 느끼면서 타인이 도저히 침범할 수 없는 가치를
소유한 것처럼 상상하기도 했다.
그 흔들의자가 백조 모양이었던 것이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백조는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큰 새이다.
아름다움과 깨끗함의 상징인 백조는 고대의 미와 사랑의 여신이었던 비너스의 새였다.
인도에서는 창조의 신인 브라마(Brahma)가 백조를 타고 다닌다고 여긴다.
백조라는 표상을 통해서 어린 그녀가 느끼는 사랑과 기쁨, 강함과 아름다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품위 같은 것은
소리치고 때리는 그녀의 아버지조차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소녀는 백조 위에 앉으면 노래가 흘러 나왔다.
노래를 부름으로써 소녀는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기쁨의 원천인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이런 기쁨은 소녀가 입은 상처와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없어지지 않고 내면의 저 깊은 곳에 들어 있다가
다시 솟아오른 것이다.
그녀가 이런 삶의 기쁨, 그리고 생명력의 원천과 접하고 있는 동안 상처와 고통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녀는 자기 자신, 이 세상,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건강하고 좋은 상태에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는 하나의 중요한 걸음이다.
이것은 또한 그녀의 영성적 자취이기도 하다.
나에게 이런 체험을 말했을 때, 그 부인은 일종의 영성적 위기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느님이 사라져 버린 듯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영성적인 내용들이 모두 없어져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고
현실과 동떨어져서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고유한 영성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춤을 추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 자주 음악을 튼다고도 했다.
이것은 내면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충동일 뿐 영적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제 그녀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러면서 자신의 춤과 노래를 소녀 시절에 발견했던 영적 자취와 연결시킬 수 있다고 느꼈다.
이제 그 부인은 수도원에서 배운 영적 삶의 방법들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헛수고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 자신을 노래하고 춤추도록 부추기는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생명력을 따름으로써
스스로 영성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과 평화롭게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내적 생명력이 기쁨으로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던 또 다른 장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그곳은 마을에 있던 작은 성당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여자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게 좋았다.
그녀는 인형에게 옷을 입히기도 했고, 유모차에 뉘어 두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성당 안의 의자에 올라서서 인형을 흔들어 대기도 했다.
성당지기는 그녀가 그렇게 노는 것을 금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런 놀이를 성당 안에서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당시 어린 소녀였던 그녀는 왜 자신이 성당 안에서,
그리고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즐겨놀았던가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그런 장소들을 특별한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발견해 내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 무엇이 자신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인자하신 모습과 어머니의 사랑을 드러내 주시는 분이다.
그녀의 친어머니는 다소 차갑고 다정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따뜻함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이들에 대하여 화를 내고 어머니와 싸우는 일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
언제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성당 안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놀리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성당은 그들에게 하나의 은신처였다. 성당은 그들에게 신비로 가득 찬 공간이었고, 생명력으로 충만된 곳,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따뜻함과 아량이 넓은 어머니와 같은 곳이었고,
화를 내는 아버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종교교육을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바라보도록 배웠고,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배웠다.
이러한 종교교육은 그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를 거슬러 올바른 하느님상을 형성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놀았던 것에 대한 회상은 그녀로 하여금 하느님을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여성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했다.
그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하느님이
그녀를 생명력과 기쁨으로 가득차게 한 것이다.
「다시 찾은 기쁨」에서
안셀름 그륀 지음 / 전헌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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