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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종의 한이 서린 영월 청령포를 가다

석란 2008. 8. 17. 19:32

단종의 한이 서린 영월 청령포를 가다

청령포는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처음으로 유배를 온 곳이다. 그만큼 이 곳의 생활은 단종임금에게는 고통스러운 곳이었을 것이다. 사면이 강으로 둘러 쌓인 작은 섬. 배가 아니면 이 곳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유배지로는 적합한 곳이다. 후일 이곳을 보존하기 위하여 1726년인 영조 2년에 금표비를 세우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했지만, 아마 그 전에도 단종복위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이곳은 철저하게 출입금지를 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두 달 동안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비 송씨를 그리워하던 단종은 홍수로 인해 청령포가 범람하자,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쳐를 옮겼다. 그러나 그 한을 삭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 강물에 던져졌으니, 그 한을 풀기나 했을까? 청령포를 찾은 날은, 날이 궂고 비까지 뿌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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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는 단종이 세조 2년(1456)에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처음 유배되었던 곳이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곳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휩쓸려,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므로, 조정에서는 영조 2년(1726)에 일반민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端廟在本) 부시유지(府時遺止)’라는 비문을 새긴 비를 영조 39년(1763)에 세웠다.

청령포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로서 피서객과 낚시꾼이 많이 찾아온다.(글/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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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는 도선을 타고 들어간다. 배가 아니면 드나즐 수가 없는 곳이다. 이 곳에서 단종임금은 첫 유배지 생활을 했다. 주변은 온통 깎아지른 절벽인데, 도선을 타고 청령포를 찾는 사람들은 그 한을 알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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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유배되어 생활을 하던 곳. 2000년 4월 단종이 머무르던 곳을 복원하였다. 안 건물과 담장을 사이에 둔 궁인들이 머무르던 초가집을 재현시켜 놓았다. 그 궁인들의 한은 또 어떠했을까? 당시의 그 피맺힌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경꾼들의 웃음소리만 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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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 지른듯 한 절벽 위에 쌓은 망향탑. 이 곳에서 단종임금은 부인인 비 송씨가 그리울 때마다, 돌을 하나씩 쌓았다. 그 돌 하나하나가 다 그리움의 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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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이 그립고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찾아 오던 곳 노산대. 기암위에 조그마한 자리에 앉아 단종임금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인 송씨를 떠나와 절해고도에 갇힌 몸. 이제는 노산대를 단종대라고 고쳐, 그 한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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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표비는 세조가 세운 것은 아니다. 영조가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해 세웠다. 그러나 이 금표비는 당시 이런 곳에 단종임금을 가두어 놓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듯 해 가슴이 더욱 아프다. 금표비에는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안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금표비가 아마도 단종복위 운동을 하려는 충신들의 발을 묶은 것과 같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청령포를 돌아보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쏟아부을 듯 시커멓다. 나이어린 임금 단종의 당시 마음이 아니었을까? 가는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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