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스크랩] <강의록>에서 - 나와 글쓰기-글쓰기는 지식과 지혜의 사회 환원이다

석란 2012. 2. 1. 21:22

제6강 나와 글쓰기-글쓰기는 지식과 지혜의 사회 환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사회 환원이다.--

정보+경험=지식(知識), 지식+경험=지혜, 지식+지혜+경험=연령
“인생의 초기는 생계와 생존을 위한 삶이고, 후기의 여가 활동과 초생존적인 삶을 인간 본래적인 자아실현의 가치 있는 삶이다.” 프롬의 말이다.
이 말이 옳다면 인간이 오래 살았다는 것은 가치 실현의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짧은 인생은 기회의 박탈이다. 이것이 살아 있음에의 긍지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나와 글쓰기를 생각해 보기
1)나도 글을 쓸 수 있다.
2)글 쓰는 사람의 기질은 세상을 뜨겁게 사는 사람이다.

1).나도 글을 쓸 수 있다.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쯤 자신의 경험이나 꿈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쓰려고 펜을 들면 소쿠리에 건져 올리는 물처럼 들끓었던 욕망는 잠시,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해 하다가 그만 둔 때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글이란 천부적인 재질이나 감성 소유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고 예단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자전거는 누구나 탈 수 있다.
글도 누구나 쓸 수 있다.
다만 훈련이 필요할 뿐이다. 자전거를 못타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머풀러를 날리며 신나게 달리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부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탈 줄 알면 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자전거는 몇 번 넘어지다 보면 쉽게 탈 수 있다. 글도 몇 번 쓰다보면 오히려 자전거 타기보다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 쓴다는 것이 별거인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말 할 줄 알고,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다면 그 자질은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한편 한편을 완성해 내는 끈기만 있으면 된다. 자전거 타기보다 더 참을성이 필요하다. 문제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글에 대한 열정이요 집념의 문제다. 문학은 일생을 두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념만 있으면 좋은 문학작품을 남길 수 있다.
조급과 중단과 포기는 글 쓰는 사람에게는 금물이다.
자전거 타기를 이론적으로 떠드는 것보다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도는 것이 효과적이듯이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써보는 것이다. 쓰다보면 기초적인 문장훈련은 어렵지 않게 터득되게 마련이다. 그 다음에 더욱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며, 쓰는 거다. 그러면 끝내는 열매를 맺게 된다. 그 열매가 자기 글이요 문학적으로 승화되면 문학작품으로 남는 것이다.
흔히 말한다.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서 쓸거리가 없다고. 극적이거나 특이한 체험에서 좋은 작품이 생산된다고. 아니다. 어떠한 삶을 살았건 자기가 살아온 길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유명하다는 사람만이 위대한 삶을 산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삶 속에 얼마든지 위대한 요소가 있다. <카프카 등 작가들, 하인스 워드, 인생극장의 주인공,......>
위대한 작품은 위대한 사람(?)의 글이 아니라 옛날에는 서민들이, 오늘날에는 보통 사람들의 작품이 한국 문학사에 매듭을 만들고 있다. 출신, 학력, 지위, 명예 등등은 문학 작품 창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현대 소설의 김동리, 황순원, 박경리 등도 보통 사람들이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이문열, 박완서 등도 대학 중퇴자다. 문학이란 특별한 신분이나 고급한 교육을 받아야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문학에서도 <변신>의 작가 카프카는 생전에 아름도 없이 살다 죽은 사람이요,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도 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학력이요, <톰소여 모험>의 마크 트웨이도 초등학교 졸업자다. 그런가 하면 <죄와 벌>의 또스또예프스키는 인생 밑바닥을 헤매고 다닌 알콜 중독자였다.
‘문학은 바로 철학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끝나는 것이다. 특히나 수필문학은 자신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의 자세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문학 장르다.
‘자아’를 찾아 떠나는 아름다운 여정에서 ‘자신에게 쓰는 편지’처럼 쓰는 것이 수필작품 쓰기다. 삶이 이론이 아니듯이 글쓰기도 이론 이전에 쓰는 것이 작품 쓰기의 정도라 본다. 문학 이론에 끌리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쓴 일이다. 문학하는 마음은 늘 열려 있어야 하고 결코 편벽(便辟)된 주장이나, 이론이나, 명분에 시중들지 않는 것이다. 문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부단한 자기 성찰과 자기경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랬듯이 글쓰기에 있어서도, 그것의 일정한 성취를 위해서는 왕성한 의욕과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 작가적 위상을 누리는 작가들은 뼈를 깎는 문학 수업의 고통에서 얻은 결과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그들은 천부적 타고난 재질이나 감성의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도 글 쓸 자질이 있다. 쓰자 쓰자 그러면 그 어느 날 나도 자랑스런 작가가 될 것이다.
작가들이 지닌 공통점은 무엇인가.
2) 글쓰는 사람은 세상을 뜨겁게 사는 사람이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그 중 문학적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인생과 우주에 대하여 철저하게 고뇌하는 사람이다. 작가들은 구름 한 점, 스쳐 가는 바람 한 결, 풀잎 뒤에 맺힌 이슬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신비한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탐색했다.
어찌 내가 감동하지 않고 남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내가 울어보지 않고 남을 울릴 수 있겠는가.
눈 내리는 육교 위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독거노인의 외로운 죽음을 보고,
성 추행을 당하고 죽은 소녀를 보고,
갖가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슬픈 사연들을 보고,
그러가 하면 장한 사람들을 보고......
우리주변의 슬프고 신나는 상황을 떠올리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 함께 기쁨을 나누려는 사람, 그는 풀잎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풀잎 같은 사람은 보통 사람이다. 문학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 감성의 세계다. 감성이 있는 사람은 삶과 자연을 느끼며 산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자신과 인간과 우주에 대하여 스침이 아니라 관심이요, 흥미요, 노력이요, 의미의 탐색이다. 그 탐색은 얼마나 철저한 관심과 뜨거운 체험을 가질 수 있느냐다. 신념과 각오와 용기다.
용기, 이왕이면 아예 그 아주머니 옆에서 웃옷을 아이에게 덮어주고 눈을 같이 맞으며 가난의, 배고픔의 아픔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그런 동참의 심정을 지닌 사람이면 당장 글을 써도 좋다. 이것이 작가 정신이다.
이런 정신을 지닌 사람이 작가다.
나도 이런 정신을 신장하여 작가로 살자. 나는 작가가 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월리엄 스태포드((william Stafford)

언젠가 저 강물이 불어나는 날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내가 어떤 실수들을 저질렀는지
내가 한 일들이 곧 내 인생이지.

사람들이 천천히 머리 속에 떠오르네
어떤 이는 도움을
어떤 이는 상처를 주려 했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그들의 지독한 사랑이나 미움이
어떻게 달랐었는지

나 그대의 말을 들으리
그대와 나 돌아서서
저 말없는 강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으니
우리는 알고 있네
저 강물 속에 흐르는 물살이 숨겨져 있음을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침묵을 안고 수 마일을 흘러왔고 흘러갈 것을
저 강물의 말이 곧 나의 말임을
※ 내가 한 일들이 내 인생이지
지독한 사랑과 미움의 결과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내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내 인생을 살았는지, 남의 인생을 살았는지?”
내가 하는 말이 침묵 속에서 나의 영혼으로부터 들은 그 말 그대로 이 기를 소망하는 것이 참 자기 인생의 진리가 아닐까?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남의 얼굴을 가면처럼 쓰고 산일은 없는지? 내면 깊은 곳의 내 소리를 듣자.
출처 : 수필춘추
글쓴이 : 현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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