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스크랩] <강의록>에서- 수필문학의 독자성(5)-수필은 자유로운 주제 형상화의 문학>

석란 2012. 2. 1. 21:21
<강의록>-에서 수필문학의 독자성(5)
<수필은 자유로운 주제 형상화의 문학이다>

1.문학적 가치를 형성하는 주제
수필도 엄연한 문학의 한 장르라면 읽는 사람에게 ‘문학적 가치’인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즐거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을 더듬어 보자.
우선 읽으면서
0.즐거운 것-마음이나 관능(官能)이 만족스럽고 유쾌한 것.
마음이 흐뭇하고 기쁜 것.
0.기쁜 것-마음에 즐거운 느낌이 나다.
0.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주는 것- 마음이 화목(和睦)하고 마음이 편 한 것. 미소 짓게 하는 것이다.
동정심, 역겨움, 불쾌감, 공포감, 청승감, 부담감, 궁핍감, 반항심, 복수심, 허탈감을 주지 않는 것쯤으로 생각하자. 이런 정서는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치졸하고 유치하고 작아져서 주변에게 부담만을 준다. 그렇다고 이런 감정들이 문학의 세계에서는 즐거움과 동일한 감정이다. 다만 감상적(感傷的)이거나 직설적으로 나타내어 자신의 감정이 객관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노출되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억지로 강요하고 있을 때는 제외된다. 이는 감정의 폭발이지 문학적 승화가 아니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사실정과 진실성을 떠났을 때는 그것은 원망이요, 탓이요, 자기변명이요 자기옹호요 자기 넋두리일 뿐이다.
슬픔의 예를 들어보자. 진정 문학적 소질이 있는 사람이면, 문학의 주변을 서성인 사람이면 진정으로 슬플 때 운다. 그 슬픔이 극에 달하면 그는 울지 않고, 넋두리하지 않고 잠 못 이루고 삐쩍 말라서 죽는다. 넋두리 섞어서 엉엉 울다 그치고 또 생각나면 울고 또 그치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진정한 슬픔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순수한 슬픔은 아니다.
고동주님의 ‘천생연분’이란 수필에서 아내의 죽음의 슬픔에 젖은 노인은 운 적이 없고 슬픔을 토로하지 않았다. 아내 산소에 늘 성묘하고, 그 길로 병을 얻어 한 달만에 아내 곁으로 갔다. 김소운님의 ‘도마소리’도 죽은 애인을 찾아 헤맬 뿐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다.
순수에는 말이 필요 없다. 예를 들어 순수한 슬픔, 순수한 사랑, 순수한 희생, 순수한 .......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진정한 순수를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순수한 대상에 대한 미안과 죄스러움이라 말했다.
친구의 죽음을 슬픔의 <In memoriam>란 시를 길게 쓰고 그 시속에
나는 가끔 내가 느끼는 슬픔을
말로서 표현한다는 것을
반은 죄짓는 일이라 생각한다.
말이란 것은 자연(自然)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 마음 속 깊은 영혼을
절반을 나타내면서도
절반은 감추어 버리기 때문이다.
절반을 나타내면서 절반을 감춰 버리는 그 모순이 또한 우리의 말이 아니지 생각해 보자. 너무나 기가 막히면 말 못하는 그 심정도 있지 않은가?
2.버려야 할 주제의 유산
문학적 가치인 문학적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주제는 버리자. 슬픔은 문학의 주된 주제이지만 슬픔에의 청승과 가난에의 궁상만은 버려야 한다. 청승과 궁상은 즐거움이 아니다. 그것은 동정이요 약자의 직설적 감정의 토로일 뿐이다. 문학이 예술의 한 영역인 이상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다루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가 문제다. 표현방법-예술적 고려-가 무시된 작품은 신문의 사설, 목사의 설교, 정치가의 연설문이 될지언정 문학작품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일본 작가 료혜이의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을 읽어보자.. 이 작품은 아름다운 구절과 해피엔딩이 좋고, 청승이 슬픔과 다르듯이 가난과 궁상이 같지 않음을 보여준 작품이며 가난의 예술적 승화를 보여준 작품이다. 마음씨 아름다운 주인공들을 만나고 싶다. 우리도 그런 착한 마음씨를 갖도록 하자.


출처 : 수필춘추
글쓴이 : 현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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