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스크랩] 창작의 주춧돌 (6) -- 살아있는 수필쓰기

석란 2012. 2. 1. 20:16
 

                   살아 있는 수필쓰기

     

                                          

1. 첫머리에

 지금처럼 수필문학이 시대의 총아가 될 것인가?  수필문학은 유래 없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다. 요즈음 발간되는 월간지, 격월간지, 계간지, 동인지를 비롯하여 서점에 무수히 진열되어 있는 수필집들을 두고 볼 때, 그 기세는 폭발적이다.

 다만 그 작품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만큼, 당연히 요구와 비판이 따른다. 독자로 하여금 일생의 일면을 엿보게 하고, 세상과 사회에 대해서 혹은 사상의 문제나 취미생활에 있어서  무엇인기를 느끼게 하고 섭취하도록 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수필문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오늘날 범람하는 수필이 모두 문학작품인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를 살펴본다.  


2. 감정의 비만과 언어의 낭비는 없어야


 감정을 떠나서 글은 쓸 수 없다. 그러나 감정에 빠져서 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은 늘 혼돈하려고 하고 비만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정의 비만이 다시 말하면 감상(感傷)이다.”  

                                                                                       김기림의 말

이 말에 공감하면서 우리의 수필이 감상에 기울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제는 이 감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데 있어서 그 성실한 정신과 언어의 낭비 없이 쓴 글이 높이 평가된다.  


몽테뉴의 <에세이>에 나타난 서문을 보자.

“만약 세상의 총애를 얻고 싶었다면 나는 좀더 자신을 치장했을 것이고, 의도적인 걸음걸이로 나갔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상적인, 꾸밈없이 단순한 상태에서 나를 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여기서 나의 결점이 있는 그대로 읽혀질 것이다.”

 남의 글을 읽으면서 불쾌한 것은 빚진 것도 없이 그의 자랑을 들어 주어야 하는 일이다. 부끄러운 일은 쓰는 사람은 자신이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하는 경우다.

어느 분야든지 자랑하는 인간은 프로가 아니다.

자신에게는 항상 후한 점수를 매기면서 과보호하고 미화시키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이 말에 공감하면서 우리의 수필이 감상에 기울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수필은 본질적으로 감상이 끼어드는 문학형식임에는 긍정한다. 이는  주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는 것이 수필이며, 사라져 간 것은 모두가 감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해서 버리고 떠나온 고향도 20년 후에는 감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되고, 소름끼치는 전쟁조차도 감상적인 그리움으로 회상되는 때가 있다. 수필이야말로 감상의 억제가 요구되는 글이다.

  글은 언어, 사상, 인격의 합성물이다. 그런데 언어만으로만 구성된 글이 수필에서 자주 보인다. 그런데 인간의 두뇌에서 명멸하고 난무하는 언어를 그대로 적어간다면, 얼마나 지리멸멸한 글이 되겠는가. 언어를 소중히 여기며 낭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중요한 건 언어를 보다 더 사용하는 일이 아니고, 보다 더 절약하는 일이다.   

 계절의 변화를 감상(感傷)이 아닌 시적 정서로 절묘하게 묘사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데 있어서 그 성실한 정신이 언어의 낭비 없이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이 작품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3.작가정신의 결여


몽테뉴는  그의 <에세이> 서문에서 말한다. 

"만약 세상의 총애를 얻고 싶었다면  나는 좀더 자신을 치장했을 것이고, 의도적인 갈음걸이로 나갔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상적인, 꾸밈없이 단순한 상태에서 나를 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여기서 나의 결점이 있는 그대로 읽혀질 것이다.”

남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치장한 글’ 빚진 것도 없이 그의 자랑을 들어 주는 일은 역겨운 일이다.  열등감의 반전인지는 모르지만 보기에 민망하다.

여기에서 글 따로 사람 따로란 말이 실감된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든 프로가 아니다.’라는 말이 수긍 간다. 

 수필작품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면서 체, 척하면서 자신을 미화시키는 것은 수필가답지 못하다. 자아의 참된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몽테뉴처럼......

「나」를 중심으로 쓰는 수필은 인간적 흥미가 주의를 끈다. 여기서 ‘인간적 흥미’란 「나」를 통해 본 인간의 보편성으로 ‘인간성과 인간미’다. 따라서 수필가는 글 쓰는 긍지와 자만으로 자신의 인간적 성장에 힘써야 한다.

그 예로 피천득님의 <낙서>나 이희승님의 <오척 단구>를 보자.


4.개성의 실종

 사람은 원래 개성적 존재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수필의 소재는 일상의 주변일이다. 그 주변의 일을 그냥 스쳐 지나면서 그러려니 보아 넘기는 것이 무개성이다. 어디에나 있는 자연, 인간, 인간사, 사물들을 어디에도 없는 자연, 인간, 인간사, 사물로 그릴 때 그것이 개성 있는 생명 있는 수필이 된다.

교육의 보편화로 지식의 상식한 시대, 매스컴의 발달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사고와 행동의 평준화는 개성 상실의 시대에 살게 되었다.

 여기에서 개성 있는 글쓰기의 어려움이 있다.

작가 자기만의 인생관, 사회관, 예술관, 자연관 등등이 개성 창조의 시원이다. 

 

 이상으로 몇 가지 살아 있는 수필쓰기에대하여 살펴보았다.   

 

 <임선희,'생명있는 수필의 모색'을 중심으로 첨가한 것임>


 

 

 

 

출처 : 수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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