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스크랩] <강의록에서>삶과 문학(2)

석란 2012. 2. 1. 20:21
 

                 삶과 문학(2)

 

1.문학이 찾고 있는 것은 진실


문학이 뭐냐고?

문학이 뭐냐고 묻는다면 ‘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처럼 문학도 그런 겁니다. 그럼 그것에서 무엇을 찾는 겁니까. 그것은 ‘진실’입니다. ‘진실’의 참뜻은 잘 모르며 삽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키츠는 “아름다움은 곧 진실이고, 진실은 곧 아름다움이다.”라고 했습니다. 꼭 진실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진실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한 것도 있습니다. 좌우간 ‘진실’은 어떻든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봅시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밤낮이 있고, 생사가 있고 그런가 하면 미추가 있고, 선악이 있고, 애증이 있고, 시비가 있고, 호(好)불호가 있고, 희비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이 사실들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피하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슬픔과 괴로움이 더 많은 것 같은 데도 그 가운데서 나름대로의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도, 나 자신인 자아도, 문학도 위와 같이 상반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상반 속에서 의식으로  ‘내가 아는 나’와 무의식에 잠재한  ‘나도 모른 는 나’를 찾아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나를  찾는 것이 문학의 진실입니다.   


2. 있는 그대로의 진실

우리의 상반된 삶, 상반된 자아의 양극단에서  모두 다 드러냄이 아니라, 한 쪽만을 보여주는  야누스 적인  삶과 나를 모두 드러내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는 것이 문학에서의 진실입니다.

“당신은 인간성의 가장 일반적인, 가장 공통적인 감정만을 인정하고 채택하려는 의도에서 오히려 이를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 내가 보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농밀한 대중성과 더불어 개성의 가능성을 후광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다.”란 앙드레 지드의 말을 상기해 봅시다.

밖으로 드러남 남 보기에 좋은 감정만을 자신으로 여기고, 감추고 싶은 대중성과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순을 의식하지 못한 삶과 나를 들추어내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찾아 나를 찾읍시다.

남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내 삶의 모습.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나와 남에게 감추고 싶은 나의 모습의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우리는 삽니다.

남에게 드러내고픈 것만을 나로 알고 살며. 남 보기 좋은 나만을 나로 여기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지식이 많고 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그렇습니다.  

무례하고, 더럽고, 야비하고, 치사하고, 욕하고, 시샘 내고, 욕심 많은 것은 좀처럼 자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남에게 보인, 보이려고 한 아니면 자랑스런, 떳떳한 자기의 일면만을 내세워 잘 다듬어진 자기만이 자기로 착각하고 삽니다.

그러기에 이 진실의 길은 어려운 그러면서도 용기 있는  자기 수행의 길, 수도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 진실의 길을 찾는 철학자, 문학자는 그 많은 진리와 문학작품들은 생산하는 것입니다.  다른 생물의 세계는 그 존재가 바로 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은  “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무거운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고, 아름다움이 그 윤기 어린 눈을 지속하지 못하며, 새로운 사랑이 내일을 넘어가지 못하는 서글픈 곳”이라고 키츠는 말했고, 셀리는  “인생의 가시밭에 나 는 쓰러져 피를 흘리노라.”고 했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면서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강한 교양과 더불어 기만도 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알고, 나를 알고, 나 있는 그대로 산다는 것이 그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왜 힘드는가?


3.의식과 무의식의 비율 1;9의 삶       

인간의 의식 밑에는 무의식이라 하는 이드(id-인간 정신 현상의 최저하에 있는 본능적 쾌락 추구의 원천)가 있는데 이 비율이 1;9라는 것이 프로이드의의 주장입니다.

의식의 세계에서 내가 알고 있는 나--교양있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도            

                                                      덕적인 나로만 착각하고 있는 것 .

무의식의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내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나--오른 편으로 가려 

                                                      는데 왼 쪽으로 방향을 틀고, 칭찬하려는 데 

                                                      비꼼이 머리를 들고,도와주려는 데 시기심이

                                                      일고,

                                                     잘하려면 실수하게 만들며 방해하는 나도 모르  는 내가 있다는 것.

문제는 내가 모르는 내가 내 행동의 10분의 9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모두를 끌어안고 생활해 왔기에 그냥 일상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에 문학 작가들은 이 내가 모르는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를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작가의 의식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 캐내어 ‘있는 그대로의 우리, 나’를 보려 하면서 그 결과를 작품 속에 구체화tl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바로 문학이요, 문학이 바로 삶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아 떠나는 곳에서 에세이는 생산됩니다.

 

    같이 생각해 봅시다.


자신이 남보다 현명하고 잘났다는 오만에 빠져 산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훗날 자신의 행위를 알게 되면, 얼굴은 붉어지며 사죄하는 마음에서  차츰   자신의 착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체화 한 것이 비극을 다룬 작품들입니다.  주인   공의 행적을 더듬어 봅시다.

‘오이디프스’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오이디프스 컴풀랙스...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프스왕이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로부터 비롯하여 잠재적으로 아버지에 대하   여 반항심을 가지고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애착심을 가지는 경향을    말함. 그 반   대는 엘랙트라 컴프랙스.

혼돈과 어둠이 인간의 조건.

현명한 자아로 착각했던 자신이 페륜이라는 사실을 안 후의 겸손으로 변하   는 과정 말입니다. 

못났던 자신을 반성하며 뉘우치며 겸허한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고통을 통해서 한 송이 고요한 연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바로 문학에서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진흙탕물을 어떤 지식으로도 맑게 할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한 참 보면 맑은 물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사는 겁니다.


  제도 모르는 제 잘난 착각에 빠져 기고 만장했던  흘러간 인물의 뒷    모습을 보면서..... 긴 여운으로 남은 그 초라한 모습을 형상화해 봅시다.

  정말로 내가 이웃보다 우수합니까?

  정말로 내가 무시해도 될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내가 가진 단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출처 : 수필춘추
글쓴이 : 현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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