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춘추

[스크랩] 행복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

석란 2013. 3. 22. 13:17
행복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



이 현 복


낙엽이 떨어지고 그 위에 비가 추적추적 오는 밤이면 문득 스쳐가는 삶의 장면들이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러브신이라든가 라스트신처럼 내 생애에 있었던, 보았던, 들었던, 행복한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 추억의 눈은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행복을 가꾼 사람들 생각에 잠기기가 일쑤다. 인생이란 남의 삶을 엿보며 자신의 삶을 가꾸는 과정이기 때문일까?
나는 한 여자를 알고 있다.
사십을 바라보는 그 여자는 봄이면 돋아나는 새싹에 신비를 느끼고, 여름이면 멀리 보이는 무지개에서 삶의 환희를 맛본다. 가을이면 낙엽을 모아 밤 가는 줄 모르고 코팅을 해 정겨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주는 기쁨 속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날이면 친구에게 전화를 해 눈을 맞으며 걷자고 유혹을 한다. 그녀는 행복한 여자이리라.
나는 단칸방에서 사글세로 사는 젊은 부부를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두 살난 딸이 있다. 어느 날이다. 직장 동료인 옛친구가 찾아와서 노조운동을 함께 하자고 설득을 하였다. 한참 듣고 있던 그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지금의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아내를 바라본다.
서로가 서로에게 눈으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 부부를 생각하면 나까지도 행복감에 젖어든다. 인간의 위대성이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란 것을 나에게 일러주는 것 같아서다.
순돌이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문방구를 하는 아저씨다.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되풀이되는 아내의 오케스트라 운율 속에서 이십 년을 살았다. 물품 값을 덜 받았다느니, 왜 늦게 왔냐느니, 그렇게 동작이 느려서 밥도 못 빌어먹는다느니, 그는 평생 큰소리 한 번 못 질러보고 산 사람만 같다. 그러나 그는 “또 왜 그래요?”하면 그뿐이다. 행복한 사람이다. 거친 아내와 부딪치지 않고 살아가는 그 아저씨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안다. 주변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삶이 편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다.
“남사스럽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친척 할머니를 알고 있다. 그 할머니는 고희를 넘긴 지 오래다. TV를 보다가 사랑 표현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 빨갛게 젖어간다. 손녀손자들의 사랑 얘기를 들으면 “얘, 남사스럽다.”고 하면서도 열심히 듣는 그 표정에는 엷은 미소가 서려있다. 그 할머니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자, 여성, 여인, 부인의 시절을 지난 뻔순이가 아니라, 항상 소녀의 꿈, 처녀의 수줍음을 지닌 영원한 사춘기의 삶을 살아서다. 한국의 전형적인 여인상을 보는 것 같다.
40대 여류작가 한 분을 알고 있다. 그는 오직 한 사람, 그리움의 대상을 지니고 산다. 그들은 보고싶을 때면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다. 정신적인 사랑만을 위한 사랑을 위하여―
어느 날 들은 이야기다.
“여보세요.”
“웬일이요.”
“지금 작품 구상중인데, 커피 한 잔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바로 이 시각, 그대 생각에 잡혀 버렸어요. 같이 차 한 잔 나누고 싶어서 그냥…….”
“거기가 어딘데?”
“그냥 했다니까요.”
“어디요? 어디…….”
“여기 설악산 X커피숍이에요. 그냥 한 거라니까.”
“알았어요. 비행기 타고 갈게 기다리고 있어요.”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시고, 한 사람은 서울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언제나 그리움이 물결치는 지순한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 반복의 과정이며, 만남은 나눔이란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나눔은 정과 대화라는 것을 알고, 그것이 생활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40대 회장의 부인을 알고 있다. 그 부인도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집에는 자가용이 3대 있다. 가정부가 두 명 있다. 이 세상에 없는 것 빼고는 모두 있는 것 같다. 아 참! 그 부인의 운전기사도 있다. 새 옷을 맞춰 입는 일, 갖가지 보석을 사 모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일, 아침부터 운동을 하며 몸을 다듬는 일이 생활의 전부인 것 같다. 영원히 젊은 아내로, 남편에게 예뻐 보이려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느낄 때가 있는 부인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것보다는 행복해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는 부인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 부인은 행복하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무능과 무식과 나태를, 그리고 허영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이란 이름에 눌려 머리를 쓰면서 뛰는 주부가 ‘메뚜기의 삶’을 사랑하듯이 그 부인도 행복한 부인이다.
행복 - 그렇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가꿀 뿐, 이웃을 엿보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금의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기를 살 줄 아는,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지금 이 시간,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이 밤을 접는다.
출처 : 수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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